이야기’ 영화 <타이타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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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타이타닉호 부선장이 공개한 ‘침몰 뒤 숨겨진

이야기’

영화 <타이타닉>은 1912년, 타이타닉호가 빙산에 부딪혀 침몰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하지만 영화만으로 실제 그 당시 상황을 알기엔 한계가 있다.

당시 생존자였던 타이타닉호의 부선장은 오랜 세월 침묵 끝에 숨겨 두었던 당시의 이야기를 공개했다.

1912년 4월 14일, 거대한 비극이 일어났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하면서 1,514명이 사망했고 710명이 구조되었다.
사고 당시 38세였던 타이타닉호의 이등 항해사 ‘찰스 래히틀러’는 구조된 승객을 책임지기 위해 선원 중 유일하게 구조되었다.
그는 타이타닉호 참사의 자세한 사정을 담은 회고록을 출판했고, 아래는 그 내용을 담고 있다.
 

선장은 침몰을 앞두고 여성과 아이를 먼저
구조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많은 여성 승객들은 가족과 이별하느니 차라리 남아있기를 선택했습니다.
 
저는 높은 소리로 “여성과 아이들은 이리 오세요!” 라고 소리쳤지만, 가족을 버리고 혼자 구명보트에 오르려는 사람들은 몇 명 없었습니다.

래히틀러는 책에서 “살아 있는 동안 그 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고 언급했다.
 
첫 구명보트가 바다로 내려가고, 저는 갑판 위에 있는 한 여성에게 말했습니다. “부인, 어서 구명보트에 오르세요! 위험합니다!”
 
그녀는 뜻밖에도 고개를 흔들며 말했습니다. “아니요, 저는 배에 남을게요.”
 
그녀의 남편은 이 말을 듣고 “그러지 말고 어서 타세요! 여보!”라고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여성은 차분한 말투로 “혼자 가지 않겠어요. 당신과 함께 이 배에 남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본 그 부부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타이타닉에 탑승하고 있었던 세계 최고 부자 중 한 명 애스터 IV씨는 임신 5개월이었던 아내를 구명보트에 태웠습니다.
 
그는 갑판 위에 앉아 한 손에는 강아지를 안고 한 손에는 시가 한 대를 피우면서 멀리 가는 보트를 향해 외쳤습니다. “사랑해요, 여보!”

승객들을 대피시키고 있던 선원은 애스터 씨에게 보트에 탈 것을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박에 거절했습니다. “사람이 최소한 양심은 있어야죠.”
 
그는 마지막 남은 한 자리를 곁에 있던 한 아일랜드 여성에게 양보했습니다.
 
그리고 사고 수습 과정에서 배의 파편들에 심하게 상처를 입은 애스터 씨의 시신을 수색 중이던 승무원이 발견했습니다.
 
그는 타이타닉호를 10대도 넘게 만들 수 있는 자산을 가진 대부호였지만,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양심을 목숨으로 지킨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성공한 은행가였던 구겐하임 씨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격식을 차린 옷으로 갈아입고서 “죽더라도 체통을 지키고 신사처럼 죽겠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구겐하임 씨가 아내에게 남긴 쪽지에는 이런 글이 써져있었습니다.
“이 배에는 나의 이기심으로 구조받지 못하는 여성은 없을 것이오. 나는 금수만도 못한 삶을 사느니 신사답게 죽을 것이오.”
 

미국 메이시(Macy’s) 백화점 창업자 슈트라우스 씨는 세계 2위의 부자였습니다.

그는 아내 로잘리 씨를 구명보트에 태우고자 했지만 그녀를 설득하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아내는 “당신이 가는 곳에 함께 가겠다”며 남편을 두고 구명보트에 탈 수 없다고 거듭 말했습니다.

구명보트의 책임 선원은 당시 67세였던 슈트라우스 씨에게 “어르신이 보트를 타는 것을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며 구명보트에 탈 것을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다른 남성들보다 먼저 보트에 타라고 제안한다면 거절하겠습니다”며 생사의 기로에 놓인 순간에도 초연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63세의 아내 로잘리 씨의 손을 잡고 갑판 위에 앉아 천천히 최후의 순간을 기다렸습니다.
 
현재 뉴욕 브롱크스에는 ‘바닷물로 침몰시킬 수 없었던 사랑’ 이라는 글귀가 새켜진, 슈트라우스 부부 기념비가 있습니다.

프랑스 상인 와트열 씨는 두 아이를 보트에 탄 여인에게 부탁한 뒤 배 위에 남았습니다.
 
두 아들은 구조되었고 세계 각지 언론의 도움으로 어머니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배 위에 남겨졌던 아버지는 영영 볼 수 없었습니다.
 

남편과 타이타닉호를 타고 신혼여행을 떠났던 리더파스는 혼자 살아남는 것을 거부한 채 남편을 꼭 껴안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살리기 위해 그녀를 기절시켰습니다. 리더파스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그녀는 바다 위에 떠 있는 구명보트 안이었습니다.
그녀는 평생 재가하지 않고 남편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리스 로잔에서 열린 생존자모임에서 스미스 부인은 자신에게 자리를 양보한 여성을 회고했습니다.

“당시 제 두 아이가 구명보트에 오르자, 만석이라 제 자리는 없었습니다. 이 때 한 여성분이 일어나 저를 구명보트로 끌어당겼습니다. ‘올라오세요. 아이들은 엄마가 필요합니다!'”
 
그 여성은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위해 ‘이름없는 어머니’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 밖에도 희생자 중에는 억만장자 아스테드, 저명 신문가 헴스테드, 육군 소령 바트, 유명 엔지니어 루오부어 등 사회의 저명한 인사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곁에 있던 가난한 부녀자들에게 자리를 양보했습니다.
 
타이타닉호의 주요 승무원 중 50여명 중 구조를 맡았던 이등 항해사 래히틀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전부 자리를 양보하고 배와 함께 생을 마감했습니다.
 
새벽2시, 각자 도망가라는 명령을 받은 이후에도 1번 연산사 존과 필립스는 여전히 전산실에 남은 채 마지막 순간까지 ‘SOS’를 입력하며 배와 함께 가라앉았습니다.
 
선미가 바다에 잠기기 시작했을 때, 삶과 죽음을 기로에 두고 사람들은 서로에게 외쳤습니다.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해요!”
 
저는 그 날, 위대한 사랑을 보았습니다. 제가 당신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예외도 있는 법입니다. 일본 철도원 차장인 호소는 여장을 한 채 구명보트에 탑승했습니다.

그는 귀국 후에 바로 퇴직당했으며 모든 일본 신문사와 여론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는 십여년 뒤에 후회와 수치로 점철된 삶을 마감했습니다.
 
1912년, 타이타닉호 추모 행사에서 타이타닉호를 만든 선박회사는 희생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성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해상 규칙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은 약자를 위해 배려하는 개인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 조회 107

댓글 1
2

우유
후후
강릉시 홍제동

읽으면서 엉엉 울었습니다
세상은 이런 따뜻한 사람들이 있어서 살만합니다
멋진 삶을 사신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1
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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