챱챱이의 하루 일과 (8)
AM. 12:30 퇴근. 인간이 하루를 마치면 보통은 누워서 한숨 쉰다. 근데 나는 아니야. 나는 고기를 부른다. 딱 집 들어오자마자 현관 센서 불 켜지기 전에 속으로 외쳤다. “오늘은… 쌈이다. 아무도 나 못 말려. 심지어 나 자신도.” 앱을 켰고 주문은 주저함 없이. “보쌈 소자로 주세요. 쌈무와 김치는 여친인 척 와주세요. 소주는... 그냥 인생 멘토 느낌으로.” 샤워했다. 몸에 붙은 하루의 스트레스를 물로 씻어내며 속으로 되뇌었다. “고기랑 만나려면 이 정도 정결 의식은 해줘야지. 상견례라도 가는 기분이다.” 샤워 끝나고 거실로 나왔는데 문자 도착. “고객님, 보쌈 도착했습니다” 순간 숨 멎는 줄. 이건 배달음식이 아니라 치유가 도착한 알림이었다. 테이블 세팅 완료. 보쌈 줄, 쌈무 부대, 김치 특공대, 쌈장 저격수, 그리고 소주 640ml… 마치 전쟁 영화 오프닝처럼 라인업이 완벽. 쌈을 처음 쌌을 때 나는 인간이 아니라 삼겹신교의 주교였다. 쌈무에 고기 얹고 김치 살짝, 마늘 톡, 쌈장 소량... 그걸 입에 넣는 순간 내 눈에 살짝 눈물 맺힘. “이게… 진짜 종교다…” 소주 딴다. 잔에 따르고 눈 마주칠 사람 없으니까 내 자신한테 건배함. “넌 오늘도 사회에선 찌그러졌지만 이 쌈 안에선 주인공이야.” 쌈은 계속 싸였고 고기는 빠르게 사라졌다. 손에 기름 묻은 것도 모르고 입에 김치 묻은 것도 무시하고 나는 거의 보쌈 좀비처럼 움직였다. 중간에 한 번 정신 들었는데 TV는 켜져 있었고 나는 소주 마시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이거 드라마 아니고 내 삶의 실시간 리얼리티다.” 그리고, 그 순간이 왔다. 접시 위에 고기 없다. 쌈무 없다. 김치 없다. 모든 게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혼자 남았다. 젓가락 내려놓고 소파에 퍼질렀다.양팔 벌려 하늘 보고 중얼거림. “오늘도 하루가 자낫다. 쌈무는 날 감쌌고, 고기는 날 품었고, 소주는… 날 때렸다.” 엔딩 크레딧 올라가듯 소화제로 향하는 손길, 살짝 불룩한 배, 그리고 왼쪽 팔에 묻은 쌈장. 나는 생각했다. “이 삶, 맛은 있다.” 끝. (그리고 지금은 식은 소주잔 들고 “아... 고기 먹고도 외로운 건 뭐냐…” 이러면서 혼자 연기 중임.)
산월동·일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