챱챱이의 하루 일과 (15)
비는 오후부터 슬며시 내리기 시작했는데, 이 녀석은 은근히 성격이 끈질겼다.
멈추는 척하면서 또 내리고, 그쳤나 싶으면 다시 내려.
그냥 감정기복 있는 전 구여친 같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나의 '밖에 나갈까?' 하는 1초의 충동은 창밖 회색 하늘을 보는 순간 끝났다.
에어컨을 켜긴 했지만, 방 안 공기는 이상하게 눅눅하고 무겁다.
몸은 자석처럼 소파에 딱 붙어 움직일 생각을 안 하고, 나는 로스트아크 잠깐 들어갔다가 인벤토리만 보고 껐고, 보석 십자수는 꺼내지도 않고, 플스는 충전 중이라는 핑계로 방치. 결국 하루 종일 누워서 무념무상 상태.
그러다 밤 10시쯤,
내 안에 사는 위장이 고요하게 반란을 일으켰다.
"너 이대로 자면 내일 아침에 사과 못 받는다?"
그렇게 말하는 듯한 강한 신호에 나는 조용히 일어나 냉동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포장된 대패 삼겹살이 정적을 깨며 등장.
어제의 나, 참 미래 예측 잘했다.
상추, 쌈장, 마늘, 당귀까지 정갈하게 냉장고에서 소환.
'이게 인간다운 삶이지' 라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었다.
불판을 예열하고, 대패를 착 올리는 순간,
'치이익' 소리가 나며 집 안에 소리가 살아난다.
빗소리와 합쳐져 마치 불판 교향곡.
나 혼자 고기 굽는데 무슨 오케스트라가 깔린 기분.
상추 위에 당귀 깔고, 마늘 하나 올리고, 쌈장 쓱 바르고,
대패를 딱 얹는 순간
진심으로 '나 진짜 똑똑하다'는 착각이 들었다.
한 입 넣자마자 탄산이 당기고, 소주가 손에 잡혔다.
혼자 고기 구워먹으며 소주 마시는 이 타이밍,
세상에서 제일 웃기고 기특한 인간은 나였다.
고기는 말이 없다.
하지만 딱 뒤집히는 타이밍 보면,
"형, 지금이야" 하는 느낌이 있다.
불판 위 고기들이 마치 작은 코러스처럼
"야야야 우릴 그냥 두면 탄다~"
하고 몸을 뒤틀고 있는 것만 같았다.
테이블은 따뜻하고 소파는 차가워졌고,
나는 다시 그 부드러운 쿠션에 빨려들며 마무리.
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근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이 정도 비면,
삼겹살이랑 충분히 싸워볼만 했고,
승자는 내 위장이었다.
이 다음은 뭐가 기다릴까.
냉동실 구석엔 이름 모를 투명 비닐 하나가 나를 보고 있고, 불판은 깨끗이 닦여 다시 전투를 기다리는 중.
그냥 사소한 하루인데,
왜 이렇게 재밌냐 싶을 정도로 웃겼다.
— 챱챱.
산월동·일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