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찍는 것이 특별한 날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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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다가.

사진을 찍는 것이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한 의식과도 같았던 시대가 있었다.
카메라를 가지고 있는 집이 동네에 한 둘이나 있을까 싶었던 시절, 사진은 잘 차려입고 사진관에나 가야 찍을 수 있었던 그야말로 특별 이벤트와도 같았었다.
사진을 보아도 지금과는 달라, 지금은 오히려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고 해서 흑백 사진이 레트로, 빈티지 등의 이름으로 그 몫을 다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총천연색, 소위 칼라사진 이라고 부르는 사진을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던 시절이어서 모든 사진은 흑백이었다고 해도 전혀 틀린말이 아닐 것이다.

간혹 연세 높으신 어른들이나 집안의 오래된 사진첩이라도 보게 된다면 그 안에 고색창연하게 얼어있는 시간의 얼굴들을 세피아로, 흑백으로 만나게 된다.
누구누구의 혼인, 아무개의 돐, 아무개 어르신의 장례, 누구누구의 졸업, 수학여행, 소풍 등등...
카메라가 귀하고 대다수가 빈한하던 시절의 이야기들이 오히려 한 여름 포도송이처럼 따먹어도 따먹어도 다하지 못할 만큼의 추억을 꺼내오고, 때로 전설같은 이야기들이 귀뚜라미 우는 가을 밤을 새워도 못다할 만큼 오히려 풍성하게 열려 우리를 지치지 않는 시간속으로 데리고 떠난다.

세월이 흘러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쓰게되고 카메라를 가지게 되면서 전화기속에 컴퓨터속에 또는 저장장치 속에 수백 수천을 헤아리는 사진들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작 사진다운 사진을 사진첩에 고이고이 간직하는 사람들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기술이 발전했으니 0과1의 데이터로 사진을 저장하면 변색이나 파손의 위험도 없이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순간에 사진을 볼 수 있는데 굳이 번거롭고 무거운 사진첩이 필요한가 하는것이 그 주된 이유일 것이다.
또 공간을 절약하고 효율적으로 정리하는데에도 사진첩처럼 크고 두껍고 투박한 책자들은 사실 일년에 한 두번 꺼내보기 어려울 정도로 부담스러운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삶이 논리와 효율로 이루어진다고 믿지 않는다.
배터리가 수명을 다하고 전원이 끊어지는 순간 사라질 데이터로만 내 삶의 기억들을 맡겨두기에 나는 이미 너무 구식이 되어버린 탓도 있을 것이다.

돌아보면, 전화기가 전선에 매달려 있던 시절 우리는 자유로웠었다.
전화기가 전선을 떼버리고 나니 우리는 그 전화기에 묶였고 메신저도 카톡도 없던 시절 우리는 첫 눈 내리는 날 그 사거리 모퉁이 빵집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지켰었다.
메신저로 지구 반대편의 얼굴을 만나게 되면서 우리는 약속을 잊고 살기 시작했다.
다 셀수도 없을 만큼의 사진이 있어도 아름다운 사연들은 자리를 떠나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는 어느 수필가 첫문장을 가슴에 두고도 촉촉했던 마음들은 논리와 계산에 자리를 내어 주었다.
기술의 발전과 논리와 효율성의 대전제 아래 오래된 기다림과 느릿한 비효율은 가슴아픈 옛이야기 외엔 아무것도 아닌 시대가 되었다.
나는 과거만을 예찬하고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너무나도 풍요로운 것들 속에서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잃어가는 이 미증유의 아이러니를 가슴아파 하는것 뿐이다.
숱하게 많은 사진들이 있어도 꿀맛같은 이야기를 찾기 어렵고 주소록 전화번호부에 빼곡한 이름들이 있어도 잠못 이루는 밤 폭폭한 가슴 한 숟갈 떠서 나눌만한 전화번호, 이름 하나가 없는 시대를 사는 우리들을 가슴 아프게 동정하는것 뿐이다.

모든 것이 가능한 시대에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버린,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대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결핍되어 있는 이 박탈감을 치유하진 못한다 해도 그저 마주보고 앉아 푸념이라도 할 수 있는 평상 하나 마음에 두고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뿐이다.
정말 복이 많아 어쩌다 나처럼 아파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 마음 한켠에 놓아 둔 짜투리 평상에서 오랜 친구처럼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다고 투정부리는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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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잔듸밭둥이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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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님의 생각들이 저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해주네요....
나이가 들면 추억으로 허전한 가슴을 위로받기도 하는데
지금 현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편하고 간편하고 빠른것만 추구하다보니
나중에 어떤 추억으로 위로가 될까...가끔 궁금할때가 있어요

요즘같이 코르나시대에 더 팍팍해져가고 경쟁시대를 힘들게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이 안쓰럽고 짠한 마음입니다......
저의 갠한 걱정이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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