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초는 다 말라 죽고  덩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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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원
트루원
수원시 권선구 구운동
매너온도
36.8°C
지난 여름부터 나앉은 빈의자와

화초는 다 말라 죽고 
덩그러니 흙만 담긴 파란 화분들에 둘러싸인 썰렁한 24시 뼈해장국집이 있는 사거리를 지난다.
허리가 잘록하게 패인 플라스틱 요구르트 병과 빨대가 꽂힌 채로 아무렇게나 버려진 
초록색 빈 커피 용기가 함께
데굴거리는 시너 냄새가 물씬 풍기는
페인트 가게 앞도 지난다.
 
예닐곱 걸음을 떼면
천녀보살 점집 편으로 살짝 기운 전봇대 아래에
보나 마나 오늘도 어느 누가 몰래 내다버린 검정 쓰레기 봉지가 
물컹물컹 자빠져 있겠지.
 
저놈들 또 보네.
지긋지긋한 학원도 끝나고 살판이 나
땅바닥에 끌릴 듯한 검은 띠를
허리 대신 목에 두른 검도 도복을 입은 아이들이 우르르
문구점 앞 작달막한 오락기 상자 앞으로 몰려가면 돌연 그 골목길은 한결 활활 생기가 도는데
종이 밑단에 세로로 가지런히 칼집을 내고, 
가르칠 학생 모집한다는
어느 용돈 궁한 대학생의 과외모집 홍보지는 언제나 본 척 만 척 지나치겠지.
 
말만 잘하면 거저로라도 줄 것 같은
의류 세일 광고 전단지가
덕지덕지 붙은  철물점 담벼락에는
어느 나이트클럽 입구에서 조용필을 찾아달라는 나비 넥타이를 맨 말쑥한 차림의 빛 바랜 웨이터 사진이 나풀거린다.
 
찾는 손님이 뜸한지
지루하기 짝이 없는 표정의 깡마른 편의점 중년 남자는
가게 밖 빈 맥주 상자에 걸터앉아
담배 한 개비를 달고도 고소하게 꼬나물고, 피고 남은 꽁초는
마주 보이는 길 건너편
폐업한지 오래된 지하 노래방을 향해 튕겨내겠지. 
 
오리고기 도매 창고 옆 한 귀퉁이,
어른 양팔 벌린 길이만큼만
서성댈 수 있는 목줄에 단단히 묶인 진돗개를 닮다 만 덩치 큰 잡종개는
어쩌다 그런 야박한 주인을 만나
다만 몇 발자국조차도 뛰어보지 못해야 하며,
언제쯤에나 나를 보고 짓지 않을지 궁금해지기도 하는
그 골목길을 다시 지난다.
 
틀림 없이 나를 먼저 발견하고는
눈은 영 딴곳을 보며 지나치는 오십줄의 여인네를 또 보았고, 
옛날에 아버지가 술에 절어
작신작신 젓가락 두드리며 노래 부르던 대폿집을 닮은 술집에는
어느새 젊은이 너댓이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시끌벅적 호탕하게 웃고 있고, 딱히 주차장이라 할 것도 없는 작은 땅뙈기 빈 가장자리에
퉁퉁하게 배가 나온 표정없는 할매가
알록달록한 비닐 장판을 펴고 
고추 내다말리던 자리에는 
바람에 들썩이는 이름 모를 나뭇잎이 이리저리 쓸려다니고,
제 시간에 가지 못하면 곧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은  트럭 기사의 요란스러운 경적소리를 뒤로 들으며,
정지선을 한참 넘어 들어온 차량의 본넷에 마뜩찮은 눈길을 주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밤 마실 길,
날렵하게 휜 초생달 아래 그 골목길을 돌아서 한덩치하는 적막이 캄캄하게 버티고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일순, 겹겹이 에워쌓이는 이 쓸쓸함...

불을 켜두고 나올 걸...
 
ㅡ구운동의 어느 날 ㅡ

∙ 조회 432

댓글 6
6

트루원
물안개
수원시 권선구 금곡동

잘~읽고갑니다
존하루 ~ 요

트루원
helena
강남구 역삼동

근사해요. 눈 찡그려지는 풍경도 이렇게 담아낼수 있군요. 눈이 닿는 곳마다 같이 걸어가는 느낌이에요.
외로워마세요~ 그 시간도 다들 같이 가고 있어요^^

트루원
착한달
수원시 권선구 구운동

멋찌시다..나이대가 비슷하면 친구 하고 싶으네요.. 전 그림그리는사람임..

트루원
초록이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시인이십니다.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그
모습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일부분일테지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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