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할머니 집은 신비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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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한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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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

어릴 때 할머니 집은 신비한 곳이기도 했지만,
심심함과 기다림의 길목이었다.
눈뜨면 사라지고 없는 사람들
눈 떠서 닭장에 달걀이 나타나고
분명히 자기 전에 있던 사람들과
분명히 자기 전에 없던 달걀들이 생겨났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만, 어린 마음에
사라져 버린 고모와 삼촌을 찾아 윗방과
건넌방을 뒤지며 울며 밥을 먹곤 했다.
내 울음에 할아버지는 날 안고 닭장으로
데려갔고 닭을 무서워하는 난 울음을 멈추었다.
벌벌 떠는 날 할아버지는 꼭 안고 닭들이
다 나간 둥지에서 따뜻한 달걀을 꺼내 
보여 주셨다.
이불에 묻어둔 밥에 달걀과 참기름, 간장, 깨를 넣고 밥을 비벼 할머니는 밥을 주셨다.
아침마다 일어나는 나의 소동이다.
계란 하나도 소중했던 시골 할머니 집에서의
나의 술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밥을 먹는 동안 할아버지는 
논으로 나가셨고 할머니는 마당 앞 밭에서 
일을 하신다.
혼자 먹다 먹기 싫어진 밥은 반 그릇도
넘게 남긴다.
시골집 밥그릇이 큰 덕에 다 먹은 기억은
한참이 지나서 인 것 같다.
그렇게 점심때가 오기 전에 고모가 올까 싶어
왕소나무로 걸어갔다.
왕소나무에서는 큰길 신작로가 보여
그곳에서 고모와 삼촌을 기다리곤 했다.
할머니 집에서 보이는 제일 큰 소나무
두 팔을 벌리고 나무 몸뚱이를 4번, 아니
6번을 벌리고 돌아야 했던 큰 소나무 밑에서
막내 고모를 기다린다.

고모가 가져올 급식 빵에 점심은 안 먹는다.
아침에 사라진 고모들과 삼촌을 기다리는 것이
내 하루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학교로 사라진 고모와 삼촌을 기다리는 일이
시골 할머니 집에서 나의 일이었다.
혼자는 심심해 그렇게 왕소나무 밑에서 앉아
기다는 내게 누군가 손을 내민다.
놀란 내게 손을 내밀라는 듯, 
그놈은 자기 주먹을 내민다.
한 손을 펴 내밀자 땅콩이 떨어진다.
땅으로 땅콩이 떨어질라 두 손으로 
땅콩을 받는다.
두 손 가득 땅콩이 있어 땅콩은 입으로
먹어야 했다.
그놈이 "서울 애라 손도 작네 " 하며 가버린다.
그놈 가는 뒤를 보고 있다.
내 눈은 다시 신작로를 보며 땅콩을 입으로 먹고 있는데, 그놈이 다시 왔다.
그리곤 이번엔 일어나라고 손 짓을 한다.
두 손에 가득 든 땅콩 때문에 혼자 설 수 없는
날 일으켜 세워 준다.
그리곤 멀뚱 거리는 내게 땅콩을 주머니마다
넣어준다. 주머니는 불룩해진다.
그놈은 내 주머니를 채워주고는 또 가버렸다.
주머니 속 땅콩이 빠질까 봐, 난 앉지도 못한다.
그렇게 서서 손에 든 땅콩을 한 알 한 알 먹고 있는데, 서 있는 게 힘들어 할머니 집으로 향한다.

조심스럽게 천천히 걸어야 한다.
주머니에 든 땅콩과 손에 든 땅콩을
떨어뜨리고 싶지 않아 온몸에 힘을
주고 걸어서 벌서는 기분으로 걸음을 걷는다.
왕소나무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거리인데,
달려 숨이 찰 정도인 거리인데, 
할머니 집이 참 멀다.
천천히 걸어야 하고 조심스럽게 걸어야 해서
조금씩 짜증이 나기 시작하면서도 땅콩이
떨어지는 것과 엎어지는 걸 조심하며 간신히
할머니 집에 도착한다.
내 먹던 밥상은 그대로 있고 천으로 씌워져 있다.
그 밥상에 땅콩을 내려놓는다.
주머니 땅콩도 다 꺼내서 밥상에 털어놓는다.
'휴' 한숨과 안도와 무사히 가져온 땅콩.
그놈은 땅콩을 줘서 좋은 놈이고
그놈은 날 힘들게 해서 나쁜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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